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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의 밉상, 오국상

알깨남 2024. 1. 16. 04:27

「서울의 봄」을 늦게서야 관람했다.
영화적으로는 재미있는데, 현실과 무관치 않은 얘기여서 마음은 무거웠다. 
김의성이 연기한 오국상이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1993년, 오국상의 실제인물이 국회에서 증언한 적이 있다.
그 실제인물의 발언을 보면 영화속 오국상의 캐릭터는 잘 잡은 듯 하다. 

 
오늘 기어코 「서울의 봄」을 보았다. 보면 불편할 것 같아서 미뤄오다, 지금 아니면 영화관에서는 이제 못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집을 나섰다. 내가 이 영화 관람을 미리 불편해 한 속내는 복잡하다. 과도한 감정이입이겠지만, 오랫동안 숨겨온 내 치부가 드러날 것 같은 그런 비슷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영화 서울의 봄

 
군 문화와 오래 함께 했기에, 영화속 장면들이 익숙했다. 이태신 장군의 취임식 씬(scene)이 촬영된 곳은 내 초급장교 시절의 애환이 깃든 곳이라 금방 알아봤다. 고증도 잘했고 연출도 뛰어나 몰입감이 좋았다. 그러나 예상했던대로, 군의 속살들이 리얼하게 나올때면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나 혼자만 볼려고 쓴 비망록이 누군가에 의해 새나간 것 같은 당혹감? 뭐 그런 것이다.
 
1212는 우리 현대사에 큰 충격이었고, 정부차원에서 역사적 평가가 이미 내려졌다. 그래서 어떤 해석을 다시 추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 정리할 부분은 일기장에 쓰더라도, 영화를 본 감상 하나쯤은 남겨야 할 것 같아 가볍게 건드려 본다.
 

영화의 최고 밉상, 오국상

영웅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악인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 대비가 클수록 영웅의 서사는 더 강렬하게 읽힌다. 이 영화에서 가장 밉상으로 등극한 캐릭터는 배우 김의성이 연기한 오국상 국방장관이다. 영화 속 오국상의 행적은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묘사되었다.
 

서울의 봄에서 오국상 역을 연기한 김의성

 
김의성도 무대 인사를 돌면, 전두광 역의 황정민보다 사람들이 자신을 제일 미워한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오국상은, 1212 당시 장관으로서 자신의 소임은 다하지 못했으면서, 쿠데타 성공을 저지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때마다 절묘하게 전두광 장군의 성공을 어시스트한다.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이 벌어질 때, 옆 관사에 살던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급히 피신한다. 이리저리 자기 안위를 챙기다가, 나중에는 국방부 계단 밑에서 발각되는 등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가 쿠데타 진압작전에는 결정적일 때마다 훼방을 놓았으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임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전두광보다 더 미워보였을 것이다. 
 
영화이기에 그의 캐릭터가 더욱 빌런같이 연출되기도 했겠지만, 오국상의 실제 인물인 '노재현' 당시 장관이 1212에 관해 국회 증언하는 모습을 보면 '밉상행동' 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노재현의 얄미웠던 증언

1993년, 1212와 관련된 국회 청문회에서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이 출석했다. 영화의 오국상 장관이다. 그의 청문회 발언을 보면 얄밉다. 태연하게 그리고 약간은 느끼하게, 마치 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는 당시의 사실을 자기가 일깨워 주는 양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장태완 사령관이
‘자기 부대를 자신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라고 딱 통솔이 됐으면,
1212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수경사령관인 장태완 장군이 자기 직속 부대인 장세동의 30경비단, 김진영의 33경비단, 헌병단 등을 장악만 잘해서 그들이 전두환 장군의 행동대가 되지 않았다면 1212 는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쿠데타 세력의 지휘소가 장세동의 30경비단이었고, 참모총장을 체포한 병력이 헌병단 소속이었으며, 그들의 지휘소 방호를 위해 33경비단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짚은 것이다. 
 
물론 이치상으로는 맞는 말이다. 군은 위계질서가 분명한 조직이니까. 하지만 헛웃음이 나오면서, "이런 얍삽한 사람을 봤나?"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나회가 군 지휘계통의 부담이 될 정도로 자기들끼리의 결속을 강화했다는 사실을 모를리 없는 국방장관이, 그리고 장태완 사령관은 부임한지 불과 3주 밖에 안됐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가, 마치 이런 배경은 모른다는 듯이, 쿠데타에 맞서 모든 걸 걸었던 장태완을 오히려 쿠테타의 큰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바꿔버리는 신공을 국민들 앞에서 시전한 것이다.
 
총소리에 놀라 줄행랑 쳐서 사태를 수습할 배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그가, 온 몸을 던져 참군인의 길을 걸었고 그런 이유로 한(恨)서린 인간적 고초를 겪었던 사람에게 교묘한 언사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고 있으면, 딱 넘어가기 좋게 타이르듯 말한다. '사실은 이런거야, 알기나 해?' 하듯이.
 


 
1212 주역들과 그 반대편에 섰던 군인들 모두, 이제 하나 둘씩 생을 마감해 간다. 전두환도 노태우도, 장태완도, 정병주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오국상으로 등장했던 노재현 역시 2019년에 눈을 감았다.
 
죽어서 그들은 서로 만났을까? 저쪽 세상에서라도 사과할 사람은 사과하고, 용서할 사람은 용서했기를 바란다. 육체를 벗어나서 보는 세상 일들은 또 다를 것이다. 왜 이런 걸로 목숨을 걸었나 싶기도 할 것이다. 서로 허허 웃어버리고 털어버리기를.
 

출처 : Pixabay, Peggy und Marco Lachmann-Anke의 이미지.

 
살아있는 우리들은, 당신들이 벌인 한바탕 소동과 그 후에 일어난 일들에서 교훈을 얻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활용해 나갈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