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존재의 핵심은 의식입니다. 그것은 자기-인식적인(self-aware) 정교한 의식입니다.
자기-인식적인 의식은 뭔가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른 나' 를 창조하여 운용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나' 를 진짜 자기와 동일시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성장한다는 말은, 과거에 창조했던 이 '나' 를 죽게하고, 새로운 나를 태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삶의 원리 시리즈」 의 마지막 글입니다.
지금까지 여덟 번의 연재를 통해, 우리 삶에 적용되는 원리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 "네 뜻대로 하라"
- "뿌린대로 거두리라" ep.1,2,3
- "고인물은 썩는다" ep.1,2
-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성장이다" ep.1,2
이번 글은, 자기-인식적인(self-aware) 의식을 가진 인간이 성장하는 방식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많은 분들이, 의식 성장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합니다. 역사적으로 숱한 사람들도 이런 노력을 해 왔습니다. 이를 위해, 그 동안 많은 영적 스승들이 계셨고, 그 분들이 하시는 말씀 모두는 똑같은 방향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다만, 그 분들이 가르침을 폈던 시대적, 문화적 배경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사용하는 표현이 달랐을 뿐이죠.
사람을 정신과 육체로 구분하여 설명하면, 지금 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붓다께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이를 이해시키는 것 조차 힘들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지식이 훨씬 깊어졌기에, 우리는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더 좋은 토대 위에 있습니다.
나(Self) vs 나(self)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삶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면 한번씩 하는 질문입니다. 답을 얻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의미있는 과정이지요. 그런데 이 물음에 진지하게 답하려다보면, '내 안에 내가 많다' 라는 사실을 알고 당혹스럽게 됩니다. 이쯤 되면, 더 혼란스러워져서 '도대체 나는 누구지?' 라는 지경에 이르게 되지요.
우리가 '나' 라는 한 단어로 퉁쳐 표현하지만, 실제는 다양한 갈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냥 이를 무시하고 하나의 방식으로만 표현해도 생활하는데 별 지장이 없지만, 만약 우리 내면의 탐구가 일상화되어 '나' 를 구분하여 표현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면 , 우리는 분명 더 많은 표현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雪)과 함께 살아야 하는 에스키모인들은 눈의 다양한 형상에 상응하는 여러 용어를 고안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관한 말이 수십가지가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나' 라는 말은 분화(分化)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체계적 논의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말하는 사람마다 다른 표현을 만들어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에서는 대문자 소문자를 활용하여 살짝 구분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SELF, Self, self, selves 로 변화를 주기도 하지요. 이런 방식은 신(神)을 의미하는 'god' 에도 적용되었습니다. 헬라어로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국가적 공을 들였다는 킹 제임스 성경은, GOD, God, god, gods 를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내(Self)가 창조한 나(self)
우리는 자기-인식적인 의식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자기-인식적인(self-aware) 의식은 정교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외부 상황을 감지하고 적절하게 반응도 하면서, 스스로를 아는 메타(Meta)인지도 가능하고, 배우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상상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여기에 추가하여, 이 자기 인식적인(self-aware) 의식은, 자기를 위해 봉사하는 의식체(意識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치면 앱(App) 같은 거죠. 특정 과업을 맡겨서, 그가 수행토록 하는 것입니다. 편리하죠. 그 과업을 수행할 때면, 그 앱이 알아서 하니까요. 특정 상황이 되면 몸의 반응, 감정과 사고 반응까지를 이 앱이 담당하도록 해 놓습니다. 자동으로 돌아가지요.
문제는, 이 자기-인식적인 의식이 그 앱(App)을 만들어 놓고 쓰면서, 자기자신과 이 앱을 동일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앱과 자기 자신과의 동일시는 시간이 경과할 수록 강하게 밀착됩니다. 나중에는 구분이 어려울 정도지요. 그냥 뭉뚱그려 '나' 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가 됩니다. 이 앱을 에고(Ego)라고 생각해도 크게 틀리진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그 앱이 주인이 되어버립니다. '진짜 나' 는 뒤로 밀려납니다. 간혹, 정신을 차리고 다르게 해 볼려고 해도, 이미 몸과 마음과 생각은 앱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습니다. 중독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 앱을 떼낼려고 하면, 마치 자기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애를 먹습니다.
게다가, 이 앱 역시 의식(Consciousness)의 일종입니다. 시리즈 7번째 글에서, 의식의 기본 기능을 언급했었죠.(☞ 참고) 의식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자기를 유지하려는 활동도 할 줄 압니다. 즉 생존본능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앱도 제거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칩니다. 우리의 삶이 과거의 패턴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나는 매일 죽노라"
바울이 했던 작업이 바로, 자기가 만든 앱(App)을 제거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원리에 입각하지 않은, 과거에 바울이 만들어 놓은 많은 앱들을 죽게하는 작업인 것이죠. 그 작업은 마치 자기가 죽는 것 같은 느낌을 유발합니다. 분명 자기는 죽지 않는데, 자기가 죽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처럼 표현하는 것이죠.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을 입었다' 라는 식으로도 표현합니다. 내가 창조한 '옛 나' 를 죽게해야, '새로운 나' 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이 성장하는 방식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1. 먼저 '진짜 나' 와 내가 만든 '또다른 나', 즉 앱을 구분해야 합니다.
2. 그 앱과 이별하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 앱을 죽게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3. '새로운 나' 로 '옛나' 를 대체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앱도 에너지 구성체입니다. 죽게 한다는 말은, 다시 원래의 기본 에너지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에너지적 구조가 해체되는 것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1,2,3의 세 과정은 하나 하나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앞으로 제 블로그의 많은 글에서, 이 과정들과 관련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말할 기회를 갖겠습니다.
아홉번의 연재를 마칩니다. 벅찬 주제를 얼개수준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홉개의 글 중에서, 의식성장의 방아쇠를 당길 문장이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큰 성공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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