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이제 당연한 체제가 되었다. 불가역적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은 독재나 왕정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우리 민주주의는 안녕한가?' 라고 물으면 글쎄, 사람으로 치면 최고의 컨디션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대충 겪은 1980년대
나는 유신체제, 10.26사건,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굵직한 역사의 페이지들을 겪으며 자랐다. 1980년 광주, 시위대와 군의 대립이 격화될 즈음, 아버지는 방문 앞에 두꺼운 솜이불을 이중으로 치고 우리를 재웠다. 솜이불이 총알을 막아준다는 소문이 동네 사람들 사이에 돌았던 것이다. 가끔씩 들리는 '따따다다' 소리는 어린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60을 바라보는 나는, 태어나보니 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였었다. 나의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대한민국은, 아직 민주주의가 여물지 못한 시기였을 망정, 철부지인 내가 살아가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이미 세상을 보는 눈이 커버린 열살 정도 위인 형과 누나 세대들은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 분들의 민주화를 위한 험난한 삶이 있었기에 우리 민주주의는 꽤나 괜찮은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나는 그분들께 많이 빚졌다.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지금 젊은 세대는, 나보다 더 안정된 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민주주의 체제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질 것이고, 알아서 잘 굴러갈 것만 같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라는 징후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폭도들이 난입한 미국 국회의사당
민주주의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었던 나라, 미국은 어떤가? 2021년 1월 6일,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에 대통령 선거결과를 무력화하려는 무장 폭도들이 난입 했다. '대통령 선거를 도둑맞았다' 라고 부추기는 트럼프를 옹호하려고, 그들은 미국 최고의 의사결정기구 마저 뒤엎을 셈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이었고, 대통령 후보였던 트럼프가 이 폭력을 부추겼으니 더욱 충격적이었다. 21세기에 그것도 미국에서 말이다. 이로써, 어떤 민주주의 시스템도 안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가만이 놔두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알아서 건강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런 막연한 기대와 방치 속에서 야금야금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가, 왕정에서 공화정을 거쳐 민주주의 체제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더듬어 보면, 국민한테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소수의 권력자 그룹들의 안간힘이 있었다. 그들은 권력을 세습하면서 부와 명예를 유지하고, 법위에 군림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깨어나지 못하도록 정보를 독점하고, 정계와 재계의 요직을 독식하면서 그들만의 아성을 구조화 해갔던 것이다.
그런 우울했던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혔다. 목숨을 잃기도 했고, 고문과 투옥의 고초, 사회에서 정상적인 직업을 구하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해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세상은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정보가 불량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토록 힘들게 탄생시킨 민주주의는 21세기에 들어서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정보의 오염이 심각하다. 국민은 자기가 얻은 정보를 토대로 투표를 하고, 그렇게 선출된 대표들이 국민을 대리하여 시스템을 운영한다. 그런데 국민이 투표할 때 판단의 근거가 되는 정보가 불량투성이다. 이런 불량정보를 토대로 선출되는 자가 우량 대표가 되기는 힘들다. 게다가 이런 불량정보로 인해 사람들은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다. 합리적인 토론 자체가 힘들 정도다.
과거에는 싸워서 민주주의를 세우는 시기였었다면, 지금은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벌레먹어 쓰러지지 않게 해야 하는 때다. 그런데, 우리가 나무 겉모습만 보고 한숨 돌리는 사이에, 어느덧 나무 속에 벌레가 적잖이 자리잡았음을 말해주는 현상들이 곳곳에 불거진다.
민주주의는 계속 관심이 필요하다.
중국 도교에 보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이상향이 있다. 여기서 '도(桃)' 가 복숭아를 의미한다. 복숭아는 탐스럽기도 하고, 그 꽃 향기도 좋아 이상향을 논하는데 안성맞춤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과나 배, 포도와 같은 과일보다 복숭아는 키우고 관리하기가 까다롭다. 햇볕이 잘 들고 배수가 잘 되는 곳에 심어야 하고, 심은 후에는 병충해 방제에 각별히 신경써야 하며, 가지가 무거우니 부러지지 않도록 나무 형태도 신경써주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무리지어 살면서, 지금껏 만들어 온 시스템 중 가장 이상적이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도 복숭아 나무 못지 않게 손이 많이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알아가고 있다. 정치와 언론, 법조계, 경제계에 음험한 촉수가 뻗어있다. 모른채 내버려두면, 언젠가 탐스런 복숭아 안에 벌레가 득실되고 나무는 넘어질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 본질상 손이 많이 가는 제도다. 우리 삶에 관한 사항을 스스로 결정해가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벌레마저 신경써야 한다면 손이 더 간다. 하지만 탐욕스런 권력이 우리 삶을 유린할 수 있는 체제로 회귀하도록 놔둘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은 손을 써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더 많이 현명해 졌다.
온라인에서 상품구매할 때, 제품설명도 읽고 후기까지 챙겨본다. 그리고 그 설명과 후기가 사실인지도 따져본다. 그렇듯 언론을 통한 정보도 분별해서 받아들여야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국민의 대표와 일꾼도 뽑아야 한다. 그리고 뽑은 후에는, 그들의 활동도 평가하고 전화나 메일, 댓글로 피드백 해 주어야 한다. 이런 다소 성가신(?) 활동을 깨알같이 해야, 민주주의라는 나무에 벌레가 덜 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민주시민들은 똑똑해야 하고 다부져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은 더욱 그러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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