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금융의 신뢰가 무너졌다.
때마침,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된 암호화폐가 나타났다.
기존 금융시스템이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인데 반해,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암호화폐는 투명하고 개방적이었다.
비트코인 열풍이 불었고, 많은 파급효과가 있었다.
꼭 좋은 일들만 벌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블록체인 기술에서 희망의 씨앗도 보았다.
세상일은 우연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수인가 싶었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경우도 있고, 큰 성공인 줄 알았으나 그 성공이 나중에 처참한 결과로 이어질 수 도 있다.
1928년, 영국의 세균학자 플레밍(Fleming)은 패혈증의 원인이 되는 포도상구균 박테리아를 연구하던 중, 박테리아 배양접시 뚜겅을 닫지 않고 휴가를 간다. 휴가에서 복귀해 보니 접시 위에 푸른곰팡이가 번져있는데, 그 곰팡이 주변에만 이상하게 박테리아가 없음을 발견한다. 이 푸른곰팡이에 힌트를 얻어,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개발하여 많은 생명을 구했다.
19세기, 당구공이 코끼리 상아로 만들어지던 시절, 코끼리도 보호하고 가격도 낮출 겸 새로운 소재를 찾았다. 그래서 처음 세상에 나온 플라스틱은, 인류를 구원해 줄 것 같은 제품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바다와 산을 오염시켜 인류의 삶의 터전을 독소화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칫거리 물질이 되어버렸다.
어떤 일이 어떻게 뻗어나갈지 모른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단순히 선형적인 논리로 무슨 일을 바라보면 낭패보기 쉽다. 더 큰 그림 속에서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는 균형된 시각이 없으면, 늘 후회할 일이 생기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기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후회할 일 속에서도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의 싹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미국은 2000년대 초반 부동산 시장이 달아올랐다. 사람들은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 기대했다. 서민들도 혹해서, 그들에게도 큰돈을 대출해 주는 금융상품에 유혹되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글자 그대로 최상위층보다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담보대출을 해준다는 상품에 몰려든 것이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집값은 내려가기 시작했고, 대출금리도 올라가자, 대출금 상환을 못 하는 서민들이 대량으로 발생하기 시작한다. 결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은 붕괴되었다. 대형 투자은행인 리만 브라더스도 이때 무너졌고, 수 많은 금융기관들이 쓰러졌다. 사람들의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는 크게 훼손되었고, 전세계적인 경기침체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금융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가중되자, 일부 사람들만 속사정을 알고 있는 이런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인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찾기 시작한다.
이때 '사토시 나카모토' 라는 지금까지도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블록체인' 이라는 기술에 기반한 암호화폐에 대한 개념을 8쪽짜리 논문으로 제시한다.
블록체인 기술의 부상
블록체인 기술은 1990년대에 이미 발표된 개념이었다. '블록'이란 디지털화된 거래 장부를 말하고, 이 장부들이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기술을 쓰면 거래 정보를 담은 장부를 중앙서버가 아닌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연결된 모든 컴퓨터가 공유하고 관리한다.
따라서 거래 정보가 변경되거나 조작되기 어렵다. 이처럼 블록체인 기술은 중앙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분산된 수많은 네트워크에 거래정보가 저장되어 투명성과 안전성을 높인다.
이 블록체인 기술이 사람들에게 그닥 부각되지 못하고 있을 때, 리만 브라더스 사태가 터진 것이다. 금융시스템의 불신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대안으로 떠오를 백그라운드가 제공된 것이다. 그래서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한 암호화폐 '비트코인' 은 크게 주목받았다.
비트코인의 등장은 예기치 않은 많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코인을 채굴하는데 올인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상황은 썩 바람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전기요금이 싼 나라들 위주로, 거대한 공장 같은 설비를 갖추고 채굴 경쟁이 벌어졌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국가에서 전기를 공급해 주는 모스크 사원(寺院)에서 은밀히 채굴공장을 가동하다가 발각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컴퓨터 그래픽카드 업체인 '엔비디아(NVIDIA)'는 때아닌 호황을 누렸고, 부품이 귀해진 PC의 가격은 올라갔다. 코인 광풍이 지나간 곳은 젊은 층들이 너도나도 이 판에 뛰어들었다가 많은 피해자도 속출했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다. 블록체인 기술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다. 또 다른 기회의 싹이 생겼다.
블록체인이 민주주의에 활력을 줄까?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가 정상적인 화폐로서의 기능발휘는 힘들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미 실험은 끝났다고 보이는데, 미련을 거두지 않은 쪽의 주장도 아직 꺾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암호화폐로서의 실험 결과는 별로였지만,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덕분에 사람들이 블록체인 기술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노이즈 마케팅이 된 셈이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해킹에도 안전하고, 조작도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실용화에 이르진 못했지만, 지금 금융 분야에서도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선거영역에 이를 활용하려고 탐색 중이다.
지금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대표 같지 않은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여기에 숨통을 트이게 할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국민들이 이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력은 이미 성숙되었고, 인프라도 충분하다. 국민들이 민주주의 시스템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내고, 그 방법을 찾자고 목소리를 내면 정치권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스위스나 에스토니아 같은 나라들은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 온라인 투표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지 않은가.
우리가 당장은 국가 규모의 선거에 활용할 수는 없겠지만, 작은 지자체 단위나 중소 조합 단위의 의사결정 부터 조금씩 적용해 나가면 좋겠다. 그러면서 시스템과 그 운영 능력도 키워나가다 보면, 어느새 투명하고 보안성도 신뢰할 만한 직접민주주의의 툴(tool)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지금의 대의민주주의 시스템도 일정 부분 유지하면서, 시민의 의견을 반영할 사안들은 지자체나 국회의원들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좋은 방향이고 맞는 시도인 것 같다.
이런 멋진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려고만 하면 세상 누구보다 더 빨리 해내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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