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아시안컵 축구 8강에 극적으로 진출했다.
기쁜데, '이런 기쁨을 16강전에서부터 느껴기 시작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경기 막판으로 갈수록, 사우디 선수들은 침대축구라는 장르를 선보였다. 이런 모습은 어느나라 선수가 하든 보기 거북하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었을까?
어제(1.31) 새벽 아시안컵 축구 16강전, 한국 vs 사우디 경기를 보느라 밤을 샜다. 아시안컵 16강전을 월드컵 16강전과 같은 텐션을 유지하며 본다는 것이 축구팬으로서 생소하긴 했으나, 드라마틱한 결과를 충분히 즐겼기에 밤샌 보람은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중동(中東)축구의 상징처럼 되버린 '침대축구'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2019년부터는 침대축구를 하지 못하도록, 경기가 인플레이되지 않은 시간은 모두 추가시간을 주도록 규정이 바뀌었지만, 그 추가시간 동안 벌어지는 경지지연 행위에 대해서는 아직 철저하게 적용되지 못하는 헛점이 있었다. 이를 사우디 선수들이 활용(?) 했다.
전반전은 큰 문제가 없었다. 후반 초반에 사우디가 1:0 으로 리드하자, 슬슬 조짐이 보인다. 급기야 연장전에 들어가서는 실력으로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노골적으로 드러누었다. 특히 사우디 골키퍼 알 카사르는 탁월한 선방능력과 함께, 그에 못지않은 연기능력도 보여주었다. 씁쓸했다.
승부와 반칙
전술은 야비함의 속성을 갖는다.
인류가 발전시킨(?) 무기와 전술을 쭉 따져보면, 그 저변에 흐르는 '야비함' 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이를 고대 중국의 손자(孫子)가 그의 병법서(兵法書)에, 이렇게 정리했다. "병자궤도야(兵者詭道也)"
'궤(詭)' 가 '속이다' 라는 뜻이므로, '전쟁은 속이는 게임' 이라는 말이다. 손자는 "병자궤도야" 뒤에 예시를 몇가지 든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에게는 어리버리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면서 마치 사용할 것처럼 폼을 잡고, 이익이 되는 미끼를 던져 상대를 유혹하고' 등이다.
무기의 발전 양상의 뒤에도 야비함이 흐른다. 처음에 싸움은 칼로 시작했다. 칼로 싸울 때 정면으로 대결한다는 암묵적인 원칙이 있었다. 뒤에서 무방비 상태의 상대를 찌르는 것은 무사(武士)로서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창'이 나왔다. 보다 먼 거리에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였다.
처음에 이것은 비겁한 무기로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더 먼 거리에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활'이 나왔다. 이것은 정말 치졸한 무기였다. 어떻게 사람을 누가 한 것인지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이들 무기의 사용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런 무기의 발전 양상을 요약하는 말이 '은밀성'과 '치명성'이다. 달리 말하면, 무기는 보다 상대가 모르게, 보다 회복불가능한 피해를 한번에 꽝 안겨주는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지금은 이런 무기 개발에 첨단 과학이 결합하고, 수많은 산업이 관여한다. 훌륭한(?) 명분도 당연히 가지고 있다.
상대를 패배시키는 것이 절대 선(善)이 되는 상황에서, 야비함은 얼마든지 더 좋은 말로 옷을 입는다. 그 중 하나가 '기습'이라는 말이다. 기습이란 말에는, 성공한 자의 통쾌함과 당한자의 당혹이 일란성 쌍생아처럼 함께 품어져 있다.
그리고, 군의 모든 전술은 이 기습을 지향한다. 그래야 효과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기습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해야 하고, 주의를 딴데로 돌리도록 속여야 한다. 이렇게 전술의 본질은 야비함이다. 서로 속고속이는 게임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당화되고 권장된다.
스포츠에서의 야비함
모든 경쟁에는 지켜야 할 '룰(rule)'이 있다. 하지만 그 룰이 경쟁과정의 모든 행위들을 규정할 수가 없다. 규정할 수 없는 부분은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소양에 맡긴다. 스포츠에서는 그것을 스포츠맨십(sportsmanship)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은 늘 위태위태하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심판의 눈을 피하고 룰의 공백을 이용하려는 유혹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한 때, 국가차원에서 대표선수들에게 약물을 복용시켰다. 25년 정도의 기간 동안 지속했다.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는 투수의 싸인 훔치기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논란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몸싸움이 격렬한 축구에서는 주심의 눈을 속여 교묘하게 반칙하는 방법들이 선수들끼리 전수된다.
나도 젊은시절 축구시합에 목숨 걸 때가 있었다. 부대별 대항 축구를 준비하고 경기할 때, 이런 교묘한 반칙을 사용하는데 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때는 심지어, 상대 핵심 공격수를 부상입혀 빨리 내보내라는 말도 서슴없이 오고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낯뜨거운 일이지만, 그때는 뭔가에 씌인 것 처럼 승패가 절대절명의 임무였다. 선수들 뿐만 아니라,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승리가 최고존엄의 가치였던 것이다.
축구는 많은 나라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좋아하는 인기스포츠다. 국가간 대표팀 경기는 그 승패에 국가의 자존심을 결부시킨다. 이것이 축구를 더 재미있게 즐기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선수들은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야비한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함정에 충분히 빠질 수 있다.
누가 그들을 어설픈 연기자로 만드는가?
내가 축구경기 승패에 목숨 걸던 시절을 되돌아 보았다. 승부욕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우리의 승리를 갈망하는 우리 편 많은 이들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라는 그들의 암묵적 강요가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무얼하든 우리편을 들어줄 것이었다. 경기에 유리하도록 꼼수를 부리면. '잘했다' 고 해 줄 준비가 된 사람들이 뒤에 있음을 선수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번 사우디 선수들의 침대축구를 보면서, '경기장에서의 스포츠맨십을 선수들의 소양으로만 맡겨두는 것이 좋을까' 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사우디 골키퍼는 점프 펀칭으로 공을 막은 후, 그라운드에 누워 다리에 큰 충격이 왔다는 손짓 발짓을 하면서 얼굴에 온갖 주름을 만들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연기에 속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축구라면 전문가급 수준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눈치채지 못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어설픈 엄살연기가 적어도 사우디 국민들로부터는 지지를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설령 국민들이 자기 행동이 연기임을 알더라도, 영리한 플레이로 지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우디 사람들의 상당수가 실제로 골키퍼의 이런 행위를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우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 경험에 비추어 충분히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이런 뒷배의 힘이, 선수들을 '그라운드의 어줍잖은 광대' 로 만든다. 좋아하고 옹호하는 것은 단지 그들끼리만 그렇다. 객관적으로는 우스갯거리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그들의 수준을 말해준다.
축구를 열정적으로 즐기고 우리 팀을 죽기살기로 응원하되, 그 바탕에는 인류공동의 엔터테인먼트인 스포츠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경기후에는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임을 받아들일줄도 알아야 한다. 국민들 다수가 이렇게 성숙해지면 좋겠다. 그래야 스포츠가 야비해지지 않는다.
스포츠는 선수가 어설픈 배우 역할까지 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러나 관객들이 그걸 원하면 싸구려 작품은 계속 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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