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콩깍지가 끼면...
중국 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에 '미자하(彌子瑕)'란 소년이 왕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왕은 잘 생긴 미소년들을 곁에두고 시중들게 했는데, 그 중 미자하를 가장 각별히 여겼다. 미자하는 왕을 믿고 방자한 행동을 가끔했다. 신하들은 언제 한 번 걸리기만 하면 이 방자한 놈을 혼 내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미자하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급한 전갈을 받는다. 그는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군주의 수레를 타고 궁을 빠져나간다. 당시에는 허락없이 왕의 수레를 타면 발뒤꿈치를 잘랐다. 미자하의 위법 행위를 안 신하들은 이때다 싶어, 그의 발뒤꿈치를 자르라고 왕에게 고했다.
그러나 왕은 되레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효성이 깊은 아이 아니냐?
형벌을 받을 걸 알면서도 내 수레를 타다니,
효성이 얼마나 갸륵한가?
효를 몸소 실천하였으니, 상을 내리겠노라."
또 한 번은, 미자하가 왕과 함께 정원을 거닐 때였다. 미자하가 나무에서 복숭아 하나를 따서 한 입 먹어 보니 맛이 기가 막혀, 그 한 입 벤 복숭아를 왕도 먹어보라고 권했다.
"폐하, 이 복숭아가 너무 달고 맛있습니다.
한번 드셔보십시오."
왕은 흐뭇해하며 미자하가 내미는 복숭아를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본 신하들이 또 고했다.
"미자하는 불충한 자입니다.
감히 먹던 걸 폐하께 드리다니 중벌하소서"
그러나 왕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면
그토록 맛있는 복숭아를 저가 먹지 않고
나를 주겠느냐? 정말 갸륵하지 않느냐?"
이번에도 벌 대신 상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렀다. 아름답던 미자하의 자태도 시들해졌고, 그에 따라 왕의 총애도 식어갔다. 예전에는 하는 짓마다 예쁘게 보이더니 이젠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미자하가 가벼운 죄를 하나 저질렀다. (어떤 버전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던 왕의 앞을 미자하가 그냥 지나갔을 뿐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때 왕은 크게 노하며 말했다.
"저 녀석은 과거에 몰래 내 수레를 탔으며,
게다가 저 먹던 복숭아를 과인에게 준 불충한 자다.
당장 벌을 내리도록 하라!"
미자하는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무거운 벌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눈에 쓰인 콩깍지가 벗겨지면 어떻게 되는가를 잘 알려주는 '여도지죄(餘桃之罪, 먹다 남은 복숭아를 준 죄)' 라는 고사다.
한 축구선수에게 낀 콩깍지...
아시안컵 축구가 끝난 후, 한국 축구계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휩싸였다. 축구협회의 운영 방식과 클린스만 감독의 지도력 문제가 논란이 될 것임은 다들 예상하던 바였으나, 여기에 느닷없이 선수들끼리의 불화 이슈가 더해졌다.
관련된 선수들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축구팬들이 '헉' 했다. 사랑하고 많이 귀여워했던 만큼 충격도 크게 느끼는 것 같다. 대중들의 반응이 격해지자, 그를 모델로 내세운 통신사 KT는 광고 포스터를 내렸고, 갤럭시 S-24 프로모션도 조기 종료했다. '아라치 치킨' 이라는 브랜드도 홈피에서 그의 영상을 내렸다. 가족 SNS에도 비판글이 쇄도하고, 그를 국가대표에서 영구 제명하라는 청원도 올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랑에서 미움으로 옮겨간다.
2019년 FIFA 주관 U-20 월드컵 결승전, 밤 12시에 열린 그 경기를 응원하러 아내랑 고양 화정역 광장에 갔던 기억이 선하다. 우리나라가 FIFA가 주관한 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것도 큰 화제였으나, 이강인이라는 신성(新星)이 모두를 설레게 했다.
그는 최우수선수로 뽑혀, 메시(Messi) 이후 최연소 MVP가 된다. 그의 발재간은 어나더 레벨이었고,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영리함은 축구팬들에게 쾌감을 주었다. 나는 그가 어렸을 때 찍었던 '슛돌이 이강인' 영상을 유튜브로 가끔씩 찾아봤다. 보는 것만으로 흐뭇했다. '어떻게 이런 얘가 우리나라에서 나온건가' 하며, 그를 보는 내 눈에서 꿀이 떨어질 정도였다.
벤투호 국가대표팀에 이강인이 뽑히지 않을 때, 이강인에게 왜 기회를 주지 않는거냐며 벤투를 원망했다. 가끔씩 스페인 리그 소식을 들을 때, 그가 거친 파울로 레드카드를 받거나, 자신에게 반칙한 선수에게 보복성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볼 때도, "짜식, 성깔도 있네, 대차네" 이렇게 넘겼다. 우리나라 대표 선수들 고참들이 이강인의 선을 넘는 태도에 약간 불만이 묻어나온 인터뷰를 볼 때마다, "그런 당돌함이 이강인의 장점이야, 그런게 있으니까 그라운드에서 주눅들지 않고 자기 플레이 하는 거야." 라고 응원했다.
그랬는데, 이번 일로 이강인을 보는 눈에 큰 변화가 생겼다. 사랑은 금새 미움으로, 미움을 넘어 야릇한 분노도 느껴졌다.
미숙(未熟)한 사랑
위(魏)나라 왕이 사랑한 것은, '미자하 (彌子瑕) "가 아니었다. 미자하의 '미색(美色)'이었다. 그러니 그 미색이 쇠할 때, 사랑도 식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인간이 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모두 이런 위험을 안고 있다. 이번 이강인에 관한 나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국 축구의 위상을 높여 우리 자긍심을 올려줄 '이강인의 축구 재능'을 사랑한 것이지, '이강인'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축구 재능으로 한국 축구에 기여하지 못했을 때, 게다가 팀웤을 깨뜨리는 원인을 제공했을 때, 그에 대한 사랑이 급랭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단골 단어가 있다. 바로, 배신감이다. 자기의 믿는 바대로 상대가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강인은 항상 귀엽고, 축구를 잘해서 국뽕도 가끔씩 놔주는 그런 성실한 선수여야 했는데, 그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내 기대를 저버렸으므로 내가 이제 너를 미워하는 것은 정당하다. 뭐 그런 메카니즘이다.
지극인 인간적인 심리 반응이다.
이번 축구 대표 선수들간 불화 이슈를 접하면서, 내 안에 있는 후진적 사랑 방식이 또 드러났다. 이런 질 낮은 사랑을 이강인에게만 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나랑 이런저런 연을 맺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도 필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겉으로 드러난 외양(外樣)을 사랑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또 그 둘을 구분해야 할 때, 가령 겉으로 드러난 결과나 외양이 내 맘에 들지 않을 때, 그 외양과 그 사람 자체를 구별하여, 그 외양과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 계속 좋은 사랑을 보내지 못한다. 아직 내 사랑은 미숙(未熟)한 것이다.
이강인을 사랑하는 법
이강인에게 지금 이 상황은, 쓰나미 한 가운데 서 있는 두려움을 일으킬 것이다. 수 만의 사람이 한 사람에게 미운 에너지를 발사하면 크게 위축된다. 그 미운 에너지가 얼마 전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강인에게 갔던 것들이었다. 이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그것은 이강인의 몫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강인'과 '이강인의 행위'를 구별하는 것이다. 인간 이강인은 앞으로 또 어떻게 변화할 지 모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강인에게 계속 좋은 사랑을 보낼 성숙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랑의 바탕위에 그의 행위에 대한 의견을 표출해야 한다. 자신이 이강인에게 가졌던 기대가 무너진 것에 대한 배신감과 그로 인한 분노의 언어로 날선 비판을 하는 것은 그저 분풀이일 뿐이다.
한참 어리둥절 해 있을 나의 이강인에게 이번 일이 더 큰 선수, 더 좋은 인간이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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