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삶

삶은 자유여행! Not 패키지 투어

알깨남 2024. 2. 6. 12:13

 

동경만 했던 '무전(無錢)여행'

1980년대와 90년대, 내 또래 친구들은 젊음을 자산삼아 '무전(無錢)여행' 이라는 것을 즐겼다. 베낭하나 메고 적은 돈으로 출발해서, 현지에서 알바나 히치하이킹으로 나머지 경비를 충당하는 식이었다.
 
사관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엔 줄곧 군인이었던 나는, 해외 무전여행의 가능성이 거의 원천차단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낯선 곳으로 도전하는 그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무전여행을 혼자 떠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의 용기에 존경심도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 한 구석에서 올라오는 열등감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왜냐하면 나의 성정(性情)상, 아마도  일반 대학에 진학했을지라도 무전여행에는 선뜻 나서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정 정신, 베낭여행

 
30대 후반이 되어서는, 한비야 작가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이라는 책을 보거나, 국방일보를 통해 전해지는 젊은 친구들의 세계 베낭여행 도전기를 접했다. 그들을 동경했지만, '난 저렇게 못할 것 같아' 라고 속으로 스치듯 되뇌었다.
 
이런 되뇌임은 의식의 깊은 층에서 진행되는 혼잣말이었고, 어쩌면 스스로에게 건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후로는 표면의식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엊그제 처가(妻家) 식구들과 오랜만에 카페에 모여 근황토크를 하다가 우연찮게 나온 처형(妻兄)의 말이 계기가 되어, 잊어버렸던 그 되뇌임이 힐끗 보였다. 
 
처형 부부는 얼마전에 후쿠오카로 여행을 다녀오셨다. 처음 계획하면서, 패키지여행과 자유여행 중 어느게 나을지를 정할려고 웹서핑과 주변 탐문을 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패키지여행이라는 옵션 자체가 머릿속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새큼한 레몬같은 자극이었다.  
 
처형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 머릿속도 분주해졌다. 여행에 관한 내 경험들과 생각, 그리고 나라면 패키지를 택할까 자유여행을 택할까 등의 질문을 내고 스스로 답을 하면서 5G의 속도로 회로가 돌아갔다. 그러다가 마주쳤다. 무전여행을 동경하면서도, '난 못해' 라고 스스로 걸었던 그 마음의 빗장, 낯선 곳에 홀로 던져진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본 것이다.
 

불안, 엷은 두려움

 
그것은 마치 안개처럼 마음 밑바닥을 이리저리 흘러다니고 있었다. 유령처럼 어슬렁거리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 때마다 이것저것 계산하게 만들고 주저하게 했을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사려깊고 신중한 사람이라는 외피로 포장하는 영악함도 물론 잊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자유인, 조르바(Zorba) 

1946년 카잔차키스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인 '조르바' 를 세상에 내놓았다.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고는 하지만 소설적으로 꽤 가공했을 것이다. 조르바는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나올 수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그 가상의 인물은, 순응하며 권태로운 삶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두들겼다.
 
니체가 철학으로 망치질을 했다면,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해 니체의 그 망치질을 이어받았다. 당대 사람들을 짓누르던 종교와 사회적 통념의 사슬들을 거침없이 깨부순다. 이런 조르바를 가슴속에서 한번 만나면, 그가 뿜어내는 원시적 매력에 전염되고 만다. 평생을 조르바처럼 살수는 없지만, 가끔은 조르바처럼 살아보고 싶게 만든다. 
 
작품에서 소설속 화자(話者)인 '나'는 지적(知的)이고 책을 좋아한다. 종종 지나치게 분석적이고 자신의 생각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전형적인 지식인이다. 많은 독서와 사색을 하고 붓다의 말을 곱씹지만, 실제 삶에서는 행동으로 옮기기 보다는 주저한다.  그런 '나' 를 향해,  어느날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화내지 말고 들어요,
당신 책을 한더미 쌓아 놓고 불을 질러 버려요. 그러고 나면 혹시 모르죠.
당신이 바보를 면하게 될지."

 
삶에 첨벙 뛰어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재면서, 지식으로만 이해하려는  소설속의 '나'에게, 조르바는 이렇게 곳곳에서 망치질을 날린다. 다행히 '나'는 조르바를 삶의 한가운데서 진리를 체득한 현자(賢者)로 이해하고 존중한다. 나아가 조르바의 삶의 태도를 수용한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장면, 조르바와 보스가 춤추는 모습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댄싱 씬. 사업이 망한 후, 조르바와 주인공인 '나'가 해변에서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둘이 야심차게 시작했던 사업이 모두 망가진 날, 그들은 오히려 해방을 맛본다. 그리고 해변에서 그 해방감을 춤으로 표현한다.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패마저 즐기는 것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안소니 퀸이 이 장면을 멋지게 보여주었다. BGM으로 느린듯 흥겨운 현악기의 선율이 흐르고, 그 리듬속에서 둘은 자유의 댄스 듀오가 된다. 
 
 

삶을 '자유여행' 처럼

패키지 여행은 안전하다. 여행 초보일때 이는 적절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패키지 투어만으로는 자신만의 여행을 할 수는 없다. 성장을 위해 언젠가는 편리한 둥지를 벗어나야 한다. 서툰 날개짓으로 겨우 날아가는 시기를 즐겁게 껴안아야, 삶의 깊은 향기가 익어갈테니까. 
 
자유여행이 줄 수 있는 근사한 선물 한가지가 있다면, 가끔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뻔한 길을 헤메도, 현지인이라면 하지 않을 어린애 같은 실수를 해도 흉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바보가 되는 경험과 이를 재미있는 웃음소재로 전환시키면서, 해방될 것이다. 바보가 되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난 여전히 살아있고, 그를 통해 더 많이 알게됐으니까. 그리고 이를 통해 진짜 어른이 되어감을 알고 있으니까.
 
혼자서는 이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드러내고 낯선 이들에게 어설픈 말과 몸짓으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 세상 어디에나 사람이 살고있음을 체득한다. 때로는 바가지를 쓰고, 날치기를 당하고, 싸구려 숙소의 비루함도 견디면서 겉보기와 실상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배워간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아름답기에, 마지막은 조르바 댄싱으로 마무리할 지혜도 쌓여간다. 
 
매일의 내 삶도 자유여행처럼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여행의 마무리는 항상 춤으로 매듭짓고, 미지의 또 다른 곳을 향해 설레는 첫 발을 떼고 싶다.
컴온 조르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