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글 '우리 삶에 적용되는 원리 ①' (https://eggbreaker.site/9) 에서,
우리 우주는 약 140억 년에 걸쳐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었으며, 정해진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고, 이것은 일종의 플랫폼이라는 취지의 언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플랫폼 안에서 인간과 같은 지적 생명체들이 살아가도록 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존재들이 살아가는 데에도 분명히 가이드라인과 같은 원리가 있을 것임을 전제했어요.
이번 포스팅은 그 원리 중 하나인 “네 뜻대로 하라” 입니다.
네 뜻대로 하라~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수준의 좁은 범위는 분명 아닙니다. 정말 '네 뜻대로, 맘대로 하라' 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그 범위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습니다.
지구의 역사를 보세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자신의 숭고한 의지를 발휘하여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자기 안위와 세속적 즐거움은 뒤로 한 채 이웃과 세상을 위해 사신 분들이지요. 아프리카 의료 봉사로 인류의 형제애를 고양했던 슈바이처, 사랑의 삶으로 온전히 헌신했던 마더 테레사, 인종 차별을 철페하고 평화와 화합의 정신을 실천한 넬슨 만델라, 남수단의 톤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힘썼던 이태석 신부 등 수 없이 많습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느 이름모를 산골에서, 어촌에서, 도시 변두리 자그마한 마을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삶을 하늘의 별만큼 숱하게 펼쳤을 것입니다.
한편, 이럴 수도 있나 싶은 악행을 저지른 이들도 또한 많습니다.
네로 황제는,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을 살해하고 로마를 불태워 10만명을 죽게 했어요. 히틀러는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총살하는 방식을 택했지요.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사살했는데,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그러자 이동식 가스차를 개발했습니다. 좀더 쉬운 방법이긴 했으나 더 빨리 더 많이 죽이고 싶었던 그는 은밀하게 운영되는 강제수용소 겸 가스실이라는 아이디어를 실행했습니다.
최근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관심을 받았던 '홀로도모르'도 그렇습니다. 스탈린이 행한 이 의도적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 500만 명이 굶어 죽거나, 추위와 질병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외에도, 일상에서도 수많은 강력범죄들이 일어나지요. 올 여름 우리나라에서도 묻지마 흉기난동으로 사회가 술렁이기도 했습니다. 인류역사와 함께 사기, 강도, 상해, 성폭행 등은 곳곳에서 끊이질 않았습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이 세상에 정의는 있는가? 신은 있는가? 신이 있다면 왜 전쟁 같은 참사가 나도록 내버려 두는가? 어린 자식이 눈앞에서 피흘리고 죽어가는 광경을 보는 엄마의 슬픔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라는 외침이 끓어오릅니다.
과학하는 태도의 필요성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과 세상에 대한 관점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의 태도로 말입니다. 관찰의 결과가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맞지 않으면 기꺼이 자신의 관점과 신념을 수정하는 자세가 바로 과학의 태도이지요.
인류의 진보는 모두 이런 과학하는 태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태산같은 믿음을 깨뜨릴 수 있었던 것도,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기존의 믿음을 수정하려 했던 그 의지에서 시작된 것이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에 보면, 행성운행의 법칙을 발견한 케플러의 일화가 전해집니다. 당시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도 철썩 같았지만, 천체의 운행은 '원(圓) 운동' 이라는 믿음 또한 강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신(神)이 만드신 작품이고, 그렇다면 천체의 운행은 완벽한 도형인 원(圓) 운동이 당연하다는 믿음이었지요. 카톨릭 신자였던 케플러 또한 이 믿음이 확고했습니다.
그러나 관측결과가 이상했어요. 행성의 궤도가 원(圓) 운동이라 전제하면 나오지 않아야 할 관측값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이 흔들리고, 신앙에 균열이 가는 혼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끝내 과학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객관적 관찰결과를 우선시합니다. 그래서 행성 궤도는 원이 아닌 타원 형태임을 도출해냅니다. 케플러가 발견한 행성운행의 법칙은, 우주의 별과 행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지금의 이해를 가능케 했습니다.
하지만, 행성 궤도가 타원 형태임을 인정해야 할 때, 케플러의 기분을 잘 말해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말똥'입니다. 이 타원형 궤도를 그는 계란처럼 동글동글한 말똥이라고 했어요.
과학자로서 자신이 관측한 결과는 인정해야 겠는데, 자기의 믿음이 부서지는 그 기분은 말똥을 밟은 것처럼 뜨악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케플러 자신은 타원형 궤도를 받아들이는데 무척 힘든 심리적 과정을 거쳤어요.
우리 역사를 과학하는 태도로 관찰하기
우리는 세상이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우주에는 벌어지면 안되는 일들에 대해서 분노하는 어떤 존재가 저 어디엔가 있고, 그가 악인들을 벌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들과 통치하는 지도자들이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기를 바라고, 특히 지도자들은 더욱 그래야 맞다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오랜 관측결과는 우리의 믿음과 기대와는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믿음을 그대로 고수해야 합니까? 말똥을 밟는 기분이더라도 과학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일련의 상황을 냉정하게 보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세상을 보는 렌즈에 들어붙은 필터를 제거하는 것이 맞겠지요. 필터를 제거하면 더 명료하게 보일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를 보면, 우주에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규정된 행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약속하여 스스로를 규제하는 법은 있지만, 이 우주와 자연이 인간에게 '뭐는 하고, 뭐는 하지 말고, 이것은 반드시 해야하고(Should), 이것은 해서는 안되고(Should not)' 가 없어 보이지 않나요?
그렇다면 답은 명확합니다. 이 우주라는 무대위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해도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불벼락을 내리치지도 않고, 저승사자를 보내 그의 목숨을 거두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네 뜻대로 하라'는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것이지요.
자유의지, "네 뜻대로 하라"
싸르트르가 「존재와 무」 에서 인간의 자유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는, 때로는 그 자유가 저주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신(God) 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존재에게 무슨 행동과 사고의 제약을 걸어놓았겠습니까? 뭐든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행위를 하는 각 개인들을 우주적인 차원에서 차별하지도 않음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듯, 신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마태복음 5장 45)' 처럼 말입니다. 때로는악인들이 더 잘되는 모습도 봅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 라는 도날드 월쉬의 책이 한때 많이 읽혔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책이긴 하지만, 이 책 시리즈의 초반 버전들은 우리의 생각을 확장하는 데 꽤 유익합니다. 책에 이런 대화가 나오지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God)는 네(저자)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신실한 종교인들이 흔히, '신이시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자주 묻습니다. 훌륭한 신앙인의 태도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글쎄요. 충분한 능력과 권한이 이미 주어졌는데, 그것을 사용하고 행사하려 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계속 묻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답답하지 않을까요? 혹여라도 그런 물음에 응해준다면, 그는 성장하려 하지 않고 응석만 더욱 강화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범위가 한정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이 보다 실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아, 지구에서 벌어지지 못할 일들이 없구나.
우리 인간은 무한한 자유의지를 부여받았구나.
그래서 어떤 일도 벌일 수 있구나.
이를 인정하는 일은 잔인한 일일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적이고 과학하는 태도가 이 우주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출발입니다. 우리의 삶의 무대인 이 우주에서 더 나은 뭔가를 할려면, 실체적 진실이 아닌 우리가 머릿속으로 만들어 놓은 환타지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되어 버리지 않을까요? 라는 우려가 뒤따릅니다. 80억의 사람들을 맘대로 하도록 방치해 두면 어쩌란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들지요.
하지만, 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돌아가는 우주를 보세요. 자유의지를 주어 무한히 자유롭게 하면서도, 또 그안에서 질서도 부여할 새로운 원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 포스팅은 “뿌린대로 거두리라”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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